신용회복경험담

2025.06.27 13:06

내 아이의 꿈을 믿었기에… 빚도 감당해야 했습니다

  • 최고관리자 오래 전 2025.06.27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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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입부: 채무 발생 전의 일상적인 삶 (15%)

남편과 함께 전남의 한 작은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온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벼농사와 고추, 참깨 정도를 재배하며 수입은 많지 않지만 검소하게 살아왔죠. 도시로 나간 자녀 둘은 각자 대학과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우리는 그저 시골에서 조용한 노후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딸이 연예기획사 오디션에 붙었다며 서울에서 연습생 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처음엔 반대했지만, “엄마 나 진짜 열심히 할게. 기회는 지금뿐이야”라는 말에 결국 마음을 돌렸습니다. 부모라면 아이가 하고 싶은 걸 밀어주고 싶은 마음, 다들 아시죠.



 


2. 전개: 채무 발생과 악화 과정 (25%)

문제는 연습생 생활이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들어간다는 거였습니다. 숙소비, 트레이닝비, 식비에 의상비까지 매달 70만~100만 원 가까운 돈이 필요했습니다. 처음엔 남편과 모은 적금을 일부 꺼내 썼고, 부족한 부분은 신용카드로 해결했습니다.

하지만 데뷔가 계속 미뤄졌고, 기획사에서는 활동비 명목으로 추가 비용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저는 카드론까지 받아 매달 100만 원 이상을 서울로 보내게 됐습니다. 그렇게 4년 가까이 이어진 생활 끝에, 막내는 결국 데뷔가 무산됐고 기획사도 문을 닫았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떠안은 빚은 3,900만 원. 그중 일부는 큰아들에게서 급하게 빌린 돈이었고, 나머지는 카드사에서 나온 대출이었습니다.



 


3. 위기: 개인회생 결심까지의 상황 (20%)

딸은 크게 좌절했고, 저도 정신적으로 무너졌습니다. “엄마 미안해, 다 내 탓이야”라는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를 원망할 수 없었습니다. 전 그저 믿었을 뿐이니까요.

카드사에서 연체 독촉장이 날아오고, 농협 계좌가 압류된 걸 보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습니다. 하루는 마을회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다 울음을 터뜨렸고, 함께 일하시던 분이 조심스럽게 개인회생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처음엔 “그건 사업 망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 아냐?” 했지만, 다시 알아보니 저처럼 가계부채로도 회생 절차를 밟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결국 서울에 사는 큰딸에게 도움을 청했고, 동사무소 법률 상담을 통해 회생 신청 절차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4. 해결: 개인회생 진행 과정 (25%)

서류를 준비하고, 카드사 채무 내역과 자녀에게 빌린 돈 관련 자료를 정리하는 데 한 달 이상 걸렸습니다. 농사일과 병행하며 서류를 챙기고, 서울 법원까지 다녀오는 일은 체력적으로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진심으로 제 상황을 설명하니, 법원은 저의 채무 사유가 생활비와 자녀 부양 관련이라는 점을 인정해주었습니다. 인가가 나오기까지 약 3개월, 결과는 월 18만 원씩 36개월(3년) 변제 조건이었습니다.

법원 출석 날, 판사님 앞에서 제 상황을 설명하다 눈물이 났지만, 판사님은 “부모로서 감당하신 걸 법은 이해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이 제겐 큰 위로가 됐습니다.




 


5. 결말: 현재의 변화와 희망 (15%)

지금은 변제 2년 차에 접어들었습니다. 생활은 여전히 빠듯하지만, 마음은 전보다 훨씬 편합니다. 딸도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농사일은 여전히 힘들지만 정직하게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앞으로는 욕심내지 않고, 자식에게 짐 되지 않도록 사는 게 목표입니다. 가끔 빚 생각에 잠 못 들던 밤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매달 한 발 한 발 갚아가는 이 시간이 제겐 회복의 과정입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가 ‘나는 부모로서 잘못한 걸까’ 자책하고 있다면,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사랑 때문에 진 빚도, 제도의 도움을 받아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주저 말고 도움을 요청하세요. 포기하지 않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저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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